불황을 이기는 리더십⑦

꽃의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 15세기부터 350여 년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를 통치했다. <사진=크라우드 픽>

[한국강사신문 윤상모 칼럼니스트] 1513년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0세는 당대 천재 예술가 중의 한 명으로 불리던 화가를 부른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상징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화가는 교황 가문을 상징하는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데 그 화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례자 성 요한>, 다빈치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짐, 루브르박물관 소장 <사진=굿뉴스 가톨릭갤러리>

그림속의 인물은 세례자 성 요한으로서 오른쪽 손가락이 하늘로 향하고 있다. 교황 레오 10세의 본명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미켈란젤로를 후원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차남) 이며 화가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다빈치는 ‘다빈치 코드’로 불리는 자신만 상징을 그려 넣기로 유명하다. 다빈치가 그린 요한은 왜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고 있을까? 그 의문의 해답을 풀기 위해서는 레오 10세의 증조할아버지인 코시모 데 메디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급하게 돌아온 코시모 데 메디치는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에게 고객의 편지 한 장을 전달했다. 몇 해 전 피사에서 제3의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네스 23세의 편지로 자신을 제발 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피사에서 선출된 제3의 교황은 교회의 대분열기(Great Schism, 1378-1417)에 벌어진 일이었다. 

1303년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대립 관계에 있던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는 교황이 머물고 있던 아나니를 습격해 교황을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필리프 4세는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도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으로 세웠다. 교회에 헌금을 가장 많이 내는 나라는 신도수가 가장 많은 프랑스였다. 그러나 교황은 언제나 프랑스보다 신도가 적은 이탈리아의 추기경들이 교황직을 독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옴으로써 로마교황 시대를 다시 열었다. 프랑스는 이에 불복해 아비뇽에서 새로운 대립 교황을 선출했다.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탈리아의 피사에 모여 종교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제3의 교황인 알렉산데르 5세가 선출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이로써 교황은 로마, 아비뇽, 피사에 교황청을 둔 세 명으로 늘어나 버렸다. 피사 교황이 1년 만에 서거하자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추기경이 요한네스 23세였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는 세 명의 교황이 서로 대립하는 교회의 혼란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독일의 콘스탄츠에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세 명의 교황을 모두 초대했다. 황제는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새로이 교황을 선출했다. 새로 선출된 마르티누스 5세는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황이 되었다. 피사 교황 요한네스 23세는 폐위와 함께 이전의 피사 교황을 살해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막대한 벌금을 내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요한네스 23세는 자신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메디치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요한네스 23세의 본명은 발다사레 코사였는데 해적 출신으로 무역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코사는 이 돈으로 대학에서 가짜 법학박사 학위를 땄고 성직에도 관심을 가졌다. 교회가 부패하던 시절 성직에 대한 매관매직은 흔한 일이었다. 추기경직을 매입하는데 돈이 필요하게 된 코사는 메디치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다. 조반디 데 메디치는 코사에게 대출을 해주었고 코사는 추기경에 올랐다. 추기경에 오른 코사는 피사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메디치 은행은 꿈에 그리던 교황의 주거래 은행이 되었다.

당시의 은행들이 교황의 주거래 은행이 되고자 했던 이유는 교회로 들어오는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은행업을 죄악시 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교회로 들어오는 헌금을 관리해야 했고 교황 역시 개인적으로 자신의 돈을 굴려 이윤을 돌려주는 은행이 필요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장부를 만들 수 없었던 교회는 자신들의 돈을 정확하게 관리해줄 신뢰할 수 있는 은행에 돈을 맡기고 싶어 했다.

메디치 은행의 직원들은 빈털터리가 된 요한네스 23세에게 거액의 벌금을 대출해 주는데 반대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아버지 조반니에게 메디치 은행의 고객이었던 코사에 대한 대출을 승인해 주자고 했다.

메디치 은행의 창시자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사진=위키백과>

조반니 데 메디치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으며 대출을 허락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코사는 갈 곳이 없었다. 조반니는 메디치가의 저택에 코사를 머물게 했다. 피렌체로 온 코사는 1년 만에 거액의 빚만 남긴 채 사망했다. 조반니는 이런 코사를 교황으로 예우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유명한 조각가를 초빙해 메디치 가문의 교회에 요한네스 23세의 대리석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 메디치 은행은 이 거액의 대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코사는 운명 직전, 끝까지 고객에 대한 의리를 지켜준 메디치 가문에 감사의 뜻으로 선물 하나를 남겼다. 그것은 피렌체의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세례자 성 요한의 실제 손가락이었다. 이러한 코사의 선물에 얽힌 일화를 알고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메디치 가문의 상징인 요한의 손가락을 부각시키는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발다사레 코사와 메디치 은행간의 얘기는 유럽 전역에 알려졌고 새로 선출된 로마의 교황도 알게 되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고객과의 신뢰를 끝까지 지킨 메디치 은행을 교황의 주거래 은행으로 지명했다. 유럽의 황실과 교회 지도자들 역시 메디치 은행을 자신들의 주거래 은행으로 바꾸었다. 메디치 은행은 유럽의 주요 도시로 지점을 늘려 나갔고 마침내 유럽에서 가장 큰 은행으로 성장했다. 지금의 스위스 은행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고객의 신뢰를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스위스 은행들은 메디치 은행의 고객에 대한 기본 정신을 이어받았다. 메디치 은행이 설립된 1397년부터 300년 이상을 이어온 메디치 가문의 정신은 다음과 같다.

“한결같은, 늘, 변하지 않는”

※ 참고자료 :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김상근, 21세기북스

주요기사
저작권자 © 한국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